상승과 하락 - 사우스포
[#1 상승과 하락의 강렬한 서사]
부, 명예, 가족.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의 상실, 그로인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삶을 스케치한다. 그 다음은 조금 달라질 순 있겠다. 누군가는 떨어진 나락의 삶에선 채로 구원받는다. 종교, 반성 등을 통한 정신적인 고양에 의한 구원이다. 어떤 사람은 떨어진 삶을 거부하고 다시 올라간다. 상실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빼앗겼던 것에 다시 닿기 위해 주인공은 노력한다. 소란스럽게 혹은 조용하게 영화는 운명처럼 주인공의 삶을 돌려놓고 떠난다.
하락과 상승이 가지는 삶의 위치에너지는 영화 내부에서 우리를 몰입시키고 흥분시킨다. 영화가 끝나면 암막이 쳐진 2시간 동안 우리는 인생의 하강과 상승을 통해 인생의 의미 한 조각을 깨우쳤다는 의기양양함을 얻어서 돌아가는 것이다. 하강과 상승, 그것은 전형적이면서 관통력이 있는 영화의 서사적 작법이다.
영화 '사우스포'는 이러한 하강과 상승의 작법을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다. 서사적 구조는 매우 간단하여, 단조롭기까지 한 구성이다. 복서의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주인공 빌리호프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고로 삶의 진창에 처박힌다. 삶의 고통과 함께 찾아온 복서 생명의 끝에서 그는 틱 윌스라는 노련한 트레이너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금 정상을 향해 상승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난히 복싱과 관련된 영화에서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하락과 상승의 구조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명의 복서가 전설적 트레이너와 함께 상승의 환희를 맛보다 죽는다던지(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미 늙어 복서로서의 수명이 다한 중년 남성이 극적으로 다시 링 위에 오른다던지(록키 발보아)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앞서 말 했듯이 카타르시스를 연출하기 위한 영화 작법에서의 서사적인 전형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 편으로는 복싱이라는 혹은 격투기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전형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진다. 패자는 무엇도 갖지 못한다. 극단적으로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1년에 고작 한 두 번 밖에 오를 수 없는 링에서 복서들은 자신이 준비한 몇 개월의 시간을, 혹은 자신이 살아온 전체의 시간을 걸고 싸운다. 아름다운 패배는 존재하는 것일까. 아름답게 부서진 패자들은 다시 링에 오를 수 있는가. 승자는 하나의 게임에서 다른 게임으로 이어가기 위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한다. 승리는 다음게임을 보장한다. 다음게임은 감량을 요구한다. 그 다음 게임은 부서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아득히 멀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상승과 하락의 영화적 서사는 단조롭다. 하지만 영화라는 단막극이 보여주는 복서의 삶이 가지는 상승과 하락은 극적이다. 아프고, 훌륭하고, 슬프고 기쁘다.
[#2 사우스포, 백스텝]
주인공인 빌리 호프만은 유능한 복서이다. 43전 무패라는 점에서 그렇다. KO승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도 유능한 신체를 보유한 복서라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빌리의 시합은 복싱이라기보다는 주먹다짐에 가깝다. 그는 경기 중 가드를 거의 하지 않고 공격만으로 경기를 풀어간다. 상대방이 손을 뻗을 때 자신의 손 역시 상대방에게 찔러 넣는 방향으로 경기를 운영한다. 물론 그가 상대방의 펀치를 이용하는 노련한 카운터 펀처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상대방보다 한 대 더 때리는데 집중함으로서 43승을 쌓아왔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매 경기마다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맞음으로서 경기에서 승리했다. 43전의 전쟁을 지나쳐온 그의 신체는 지쳐있었다.
영화 초반부에 일찌감치 등장하는 아내의 죽음은 그의 삶과 복서로서의 삶을 뒤흔들 중요한 사건이었다. 불행은 파도와 같아서, 한 번 넘어진 상대를 쉬지 않고 물어뜯는다. 넘어져 기력을 잃은 사내를 다음 파도가 덮친다. 그 다음 파도가 그의 목을 조른다. 그 다음 파도가 오기전에 그는 이미 깊숙이 파묻혀 가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은 연쇄적인 상관관계를 지니고 다음 파도를 초대한다. 찬란한 생활동안 톱니바퀴처럼 쌓아 올려진 소비의 거대한 벽이 신체적이고 정신적으로 지쳐서 링 위에 서지 못하는 복서의, 그래서 더 이상 막대한 양의 돈을 벌 수 없는 삶을 강타한다. 그는 집과 소유하는 모든 것은 잃었고, 적법한 법의 절차에 따라 딸의 양육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노련한 트레이너를 만나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영화보다는 만화에서나 주로 보이는, 체육관에 기거하면서 바닥을 닦는 소일을 하면서 틱 윌스의 체육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이 틱 윌스는 그를 지도할 것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들어주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아니라 그가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틱 윌스는 그에게 공격보다 방어를 요구한다. 뒷발을 앞으로 내밀게끔 하여 사우스포 자세를 연습시킨다. 전진과 백스텝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교란시킬 것을 주장한다.
절박함은 때로 변화를 만들어낸다. 몇몇은 절박한 심정에 문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문을 닫고 밖을 응시하지 않는 것으로 삶의 문제를 이연시키고, 막연히 연장된 선택의 순간을 바라보며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찌되었든 변화를 시도한다. 어쨌든 시도함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가 변하기를 바란다. 변화는 성공의 등치가 아니다. 변화는 성공의 인과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변화는 성공과 실패 혹은 그 중간 어디에나 존재하는 확률에 몸을 내 맡기는 정도의 능동성은 발휘 할 수 있다.
그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의 신체능력은 그를 압도적인 강경파로 단련시켰다. 링 위의 삶이나 링 밖의 삶이나 그는 항상 전진만을 거듭해 왔다. 부서지기 일보직전의 삶은 그에게 백스텝도, 발을 교환해 반대편 발로 서는 것도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렸다. 절망 직전의 정신은 그것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의 삶은 그렇게 서서히 구원받는다. 결국은 자신을 구원한다는 능동적 표현이 더 맞겠다. 그는 스타였었고, 몇 번의 연습경기를 지켜본 프로모터는 한물 간 스타복서가 링 위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미 황혼기를 지난 신체에 프로모터 자신의 선수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을. 그리고 얻게 될 많은 스포트라이트와 돈을 상상했다. 따라서 그의 복귀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진다. 영화의 한정된 러닝타임을 걱정하듯, 팝콘은 놓고 나가는 관객에게 소리치기 위해, 다소 상기되고 안달 나있는 얼굴로 말이다.
마지막 시합에서 그는 이긴다. 틱윌스의 트레이닝은 탁월한 것이어서, 그는 무엇보다도 유연한 방어를 보였고 이전의 그를 상상한 상대는 당황했던 것이다.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들어오는 사우스포로의 스위칭 동작을 통해 던진 펀치는 그것을 모르는 상대에게는 불예측적이고 치명적인 펀치였다. 절망은 변화를 추동했고 변화는 그의 삶을 다시 상승시켰다.
[#3 상승, 그 이후]
극단적인 하락 이후의 상승을 겪은 사람은 그 이전의 사람과는 다른 그 무언가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주위를 감지하는 실존적인 영역에서 그렇다. 자신은 이전과 다른 자아를 가진 다른 인물이 된다. 영화 속에서 빌리는 막무가내로 싸우는 복서에서 노련미를 가진 베테랑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베테랑의 곁에는 늘 있었던 아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 차이를 실감한다. 그는 거부했던 삶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서 실존적으로 부활한다.
영화에서는 재기에 성공하고, 딸의 양육권을 되찾은 후의 빌리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의 서사는 끝났고, 더이상 말로서 보여줄 이야기는 없다. 사우스포로의 극적인 변신 이후의 변화된 삶의 태도 같은 것 들을 영화에서 볼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복서는 한 경기에 자신의 삶의 궤적을 걸고 싸운다. 사우르포로의 변신은 빌리가 모든 것을 잃은 후 자신의 삶의 궤적을 어떻게든 바꾸어 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서는 바꾼 삶의 궤적을 가지고 링에 올랐고 그래서 이겼다. 승리가 보장하는 다음 경기에서 그가 이길지 질 지는 상상력의 너머에 있다. 삶끼리의 부딪침에서 자신을 송두리째 바꾸었던 결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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