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지의 폐간에 부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Life지의 폐간에 부친 영화이다. Life지는 1936년 창간 이후 사진의 형태로 기사를 전달하는 포토저널리즘의 장르를 개척하고 오랜 시간 독보적인 명성을 쌓아왔던 잡지사였다. 포토저널리즘은 당대 시대의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1928년 코닥이 발명한 컬러필름이 대중화되면서 통해 사진은 색채를 가진 현장성을 현실의 그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인 텍스트 기사가 제공할 수 있는 객관성과 현장성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저널리즘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Life는 사진 자체의 퀄리티는 물론 잡지의 구도, 인쇄 퀄리티 측면에서 경쟁사를 압도하면서 시장의 주도자가 되었다.
높은 수준의 사진을 얻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쏟는 Life지의 운영 철학은 그 명성과 몰락을 모두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Life지가 큰 명성을 얻었던 기사 중 하나인 케네디 암살은 Life지가 사진을 위해 투입한 엄청난 자본을 짐작할 수 있다. 텍사스에서 케네디가 암살당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가 자푸르더는 황급히 뉴욕으로 돌아오는 Life지의 전세기 안에서 사진 선택, 잡지 구성, 편집, 인화를 모두 마친 상태로 뉴욕에 착륙했다. 케네디 암살장면이 담긴 Life지는 이러한 막대한 자본투자를 통해 미국 전역에 가장 먼저 깔리게 되었던 것이다. Life는 프로젝트 수립 및 예산 운용 부분에서도 사진가에게 많은 예산을 배정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저널리즘의 헤게모니가 인쇄물에 있을 때는 높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지만, 헤게모니가 인쇄물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높은 인쇄부수당 원가로 인해 폐간을 앞당기는 요인이 된 것이다.
Life지는 사진매체를 싫어했던 간디, 처칠 등 많은 유명인들을 사로잡아 커버를 장식했다. 사진가에게 프로젝트 자율성을 주고 막대한 자본을 들인 덕분에 사진가들은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상, 과학기술 발달의 현장을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나아가라는 영화에 나온 그 모토처럼, Life는 렌즈를 통해 삶의 정수를 담고자 하였다. 그것이 구글이 아카이브를 통해 Life의 사진을 남겨놓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2 월터의 현실은 상상이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월터 미티는 Life지의 네거티브 필름 현상 담당자로 16년째 일하고 있다. 업무는 사진사들이 보내오는 필름 중 잡지에 들어갈 것으로 결정된 사진을 인화하는 일. 월터의 삶은 안정되어 있고, 변화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배우를 꿈꾸며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철부지 여동생 이외에는 돌출된 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면서 여행 한 번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향유하고 있는 삶의 반경을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월터의 위치와 일상은 몇 가지 사건들로 급격하게 변화한다. 하나는 몇 달 전 입사한 여직원 셰릴 멜호프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그가 몸담고 있는 Life지가 온라인 잡지사로 변경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 위기를 맞았다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 표지를 장식하기 위해 월터의 오랜 파트너 사진가 숀 오코넬이 보내온 필름의 25번 사진’이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월터가 깊게, 그리고 자주 반복했던 환상과도 같은 상상은 이제 현실과 맞닿아 잡을 수 있는 현실의 선택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월터는 현실에서 자신의 택할 수 없었던 선택지를 매우 높은 해상도로 몽상(Day Dreaming)하는 습관이 있었다. 회사 앞에서 셰릴 멜호프에게 멋지게 고백하는 일, Life지의 구조조정 전문가로 부임한 재수없는 상사와 하늘을 나는 액션씬 끝에 때려 눕히는 일은 월터의 영화적 상상력 속에서는 빛나게 반복되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 연락이 요원한 숀의 25번째 필름을 분실했다는 것, 그것의 인화를 구조조정 담당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찾고 있다는 사실은 루틴한 현실에서 분리되어 돌출된 실재한 사건이며, 월터의 상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월터의 현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월터는 분실한 25번 필름 이외의 사진들을 추적하여 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린란드로 향하고, 본격적으로 모험은 시작된다.
월터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상과도 같은 일탈에 발걸음을 옮긴다. 이 지점에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때때로 상상은 그의 현실의 선택을 밀어붙인다. 그린란드에 도착하여, 숀이 있을 것 같은 배를 잡기 위해 타야할 헬기는 만취한 운전자가 조종하는 것이었다. 월터는 주저하지만, 이내 상상에서 그를 향해 ‘우주비행사 톰’을 불러주는 세릴의 노래에 그는 극적으로 헬기에 승선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모험은 그린란드를 지나, 아이슬란드,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적 일탈이 시작되면서부터 그의 몽상(Day Dreaming)은 잦아들기 시작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의 폭보다 더 큰 일탈은 그의 신체와 정신을 온전히 바꿔 놓았고, 현실의 제약으로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선택지들은 실재하고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뀌게 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상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윌터는 셰릴 멜호프에게 고백하고, 재수없던 상사에게 한 방 먹이고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월터가 우여곡절 끝에 숀의 25번째 사진을 찾았음에도, 그것을 열어보지 않고 회사에 전달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월터의 일탈은 분실한 25번째 사진을 찾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이제 25번째 사진이 무엇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3 상상이 현실이 된 후]
주인공 월터의 업무가 ‘현상(現像)’이라는 사실은 영화 내, 외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월터는 이미 계획되고 포착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최상의 가치를 선택하고 가공하는 작업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월터는 현상(現像)과 몽상과 같은 현상(現想)의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며 서 있었다. 방아쇠와 같은 필름 분실 사건은 그의 현실과 상상의 면을 붙여 놓아 상호작용을 하게 만든다. 월터의 상상은 더 이상 멍 하니 바라보는 이세계의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행동할 수 있는 계획이 된다. 월터의 현실은 끝임없이 색체를 바꾸어 상상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상상이 현실이 된 후 월터는 Life지에서 잘린다. 25번째 필름을 찾기 위해 벌였던 소동들로 인해 그는 이미 잘린 상태였으나, 실제 대규모 구조조정 후 출범할 Life 온라인은 현상 담당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퇴사가 일면 졸업처럼 후련한 감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16년에 걸쳐 수행해왔던 현상이, 몇 개월 간의 허무맹랑할 정도로 소름 돋는 현실의 모험을 만나 비로소 현실의 벽을 부수고 세상을 만나는, Life지가 추구하는 완전한 삶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월터는 삶(Life)에 직면하여, 더 이상 우두커니 서서 상상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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