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료 행간의 상상력]
사극에서의 상상력은 사료의 행간에서 시작한다. 기록물은 충분한 편향을 가진,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력과 체력을 가진 사람이 작성한다. 인식, 육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작성했다는 매우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특성은 누락과 왜곡이라는 사료의 불완전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한다. 누락과 왜곡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단계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사고과정으로, 24시간 동안 객관적으로 관리되며 서술되어 온 조선시대 실록에도 사회의 인식이라는 무의식적 프레임이 사료 서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일식이나 월식이 조선시대 실록에는 거대한 사회적 현상으로 기술된 것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축소되거나 누락될 수 있는 것이다.
행간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사료의 불완전성은 실제로 역사의 변화를 추동한 사건이나, 인물을 사료 밖에서 찾아 점점이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든다. 역사의 재구성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역사적 인물의 가상의 행적, 가상의 인물의 역사적 행적을 상상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호흡이 매우 긴 드라마의 경우 전자의 서술방식을, 호흡이 짧은 영화의 경우 후자의 방식으로 채택하는 경향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경우는 일대기의 형식, 영화는 사건을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2 관상이라는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 한 계유정난]
김내경은 영화 ‘관상’을 만들기 위해 상상한 가상의 인물이다.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 초기 점쟁이로 명성이 높았던 홍계관을 모티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홍계관은 맹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에서 점과 같은 기술을 통해 누군가가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정도만 빌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에서 김내경은 아버지대에서 역모죄로 인해 집안이 몰락하여 처남, 아들과 숨어 지내는 양반으로 그려지고 있다. 허탈함에 집안이 몰락하게 된 원인을 찾다가 관상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놀라운 수준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김내경의 능력을 높이 산 서울 기생 연홍에 이끌려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문종 말부터 계유정난이라는 혼란한 시대적 배경에 압도적인 통찰을 지닌 관상가가 들어오는 상상을 해보자. 적어도 영화 내부에서만큼은 김내경의 관상해석은 틀린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김내경이 한양에 오게 되면서 숨겨진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지고 인정된 상태로 변화한다. 오차 없이 정확하다는 김내경 관상의 특징은 계유정난을 관통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시선을 모두 김내경 한곳에 모아, 김내경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끔 하는 매우 강력한 영화적 장치이다.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자와 권력을 차지하는 자가 모두 두려워하며 가지고 싶은 능력의 현신으로 김내경이 존재하고, 또한 관상가를 조선시대 사료에서 다룰 리 없다는 점에서 감상자 머리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행간 속에 관상가를 성공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물론 반대로, 틀리지 않는 관상학의 존재는 극의 전개를 비논리적으로 만들어 감상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역사 속으로 들어온 김내경은 그를 높이 산 김종서의 천거에 의해, 병든 문종을 만나 반란의 의도를 가진 자들을 색출해달라는 특별지시를 받게 된다. 관상학적으로 명약관화하게 반역의 상을 가지고 있는 수양대군과 조우하고, 그 능력의 사용 가치를 확인한 김종서와 수양대군 사이에서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김내경이 이 영화에 중요한 갈등을 그리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역모는 세력전이기 이전에 첩보전이다. 인간의 의도가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표현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또한 비언어적 표현이 관상을 통해 여과없이 표출된다고 가정하면 높은 적중률을 지니는 관상학자는 반역의 의도를 미리 잡아내거나 반대로 반역의 최적 시점을 잡을 수 있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파괴적인 능력이다. 또한 영화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김내경과 그의 의도를 알고 있는 가족을 통해 역모의 양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계유정난이 성공한다는 역사적 사실 안에서도 이 영화가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 사실을 추동하는 것으로 , 적어도 영화 상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가상의 인물 김내경의 선택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3 관상 is Science]
우리는 많은 사례에서, 특히 범법자와 같은 ‘사회적 악’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듣게 된다. 이는 관상이 가지는 설득력을 현재의 시점에서 상징하는 말로 치환한 것이다. 영화 내부적으로는 관상은 과학을 넘어 운명 그 자체와 동등어로 표현되지만, 관상의 설득력을 부여하는 논리는 동일하다. 관상이란 본디 타고난 마음씀씀이나 의지를 가지고 수행해 온 태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얼굴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위의 논거로부터 판단할 때, 관상학은 운명론과 非 운명론 양자에 설득력을 제시하는 논리학이다. 얼굴의 생김새와 위치, 크기 등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다는 점에서 관상학은 운명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김내경의 처남이 (조정석 분)이 영화의 큰 변화를 제공할 것을 암시하는 관상학적 요소로 목젖을 이야기하는데, 목젖의 생김새가 다른 변수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운명론적인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관상학은 평소에 지니는 마음가짐이 운명적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非 운명론적이다. 김내경이 벼슬에 오늘 아들에게 평소에 마음가짐을 곧게 가지고 좋은 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언은 이러한 내재적인 수행으로 관상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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