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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 – 번뜩이는 재치로 만든 아쉬운 블랙 코미디 - (Feat. 남산의 부장들)

Lee Word 2021. 1. 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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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의 진실은 어디부터]


 영화 '그때 그 사람들'는 박정희 암살사건이 발생하는 당일 오전부터 김재규가 육본에서 체포당하는 그 다음날, 단 이틀간의 시간을 복기한다. 이는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남산의 부장들(2020)'과는 완전히 다른 내러티브 포인트를 잡은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부마항쟁 이전부터 김재규와 차지철의 정치적, 개인적 대립과 박정희와의 대립을 서서희 심화시키면서 인과관계를 쌓아 올리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에 반해 '그때 그 사람들'은 '탕'하는 총격의 앞뒤 몇시간을 집중적으로 그려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갑자기 일어나, 갑자기 끝난다. 

 이러한 영화의 서술방식은 몇 가지 효과를 가진다. 첫째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불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대사와 극적 갈등 장치를 활용하여 박정희의 암살의 의도가 개인보다는 국가적인 측면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를 둘러 싼 갈등구조나 김재규의 암살 의도를 파악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 일어나는 사건 자체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김재규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박정희를 쏜 것인지, 본인의 과대망상에 의한 행동인지, 우발적인지 혹은 계획적인지 조차 판단하기 어렵게 그 의도를 흐려 놓았다. 이러한 방식은 김재규의 실제 의도를  본인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실과 닮아 있다. 주가가 올라가고 내려간 후 나오는 수많은 그럴듯한 분석들은 사실, 사건이 일어난 후에 끼워맞춘 퍼즐에 불과하다. 영화는 '그럴듯함'을 배제하고 사건을 보자고 선언하고 있다. 

 

 둘째는 사건 자체를 역사적 맥락에서 끌어내어 독립적으로 서술할 수 있게 한다. 영화 내에서 우리가 인과관계를 차분히 인지하기 전에 박정희는 죽었다. 이 인과관계는 즉 역사적 맥락을 의미하므로, 인과관계 없는 죽음은 곧 박정희의 암살을 역사적 사실이라는 포장에서 벗겨내어 하나의 독립적인 무대로 재편할 수 있게 한다. 영화의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배우를 통해 만담 형식으로 만들어 구성한 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잘라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보이는 연출이다. 이러한 맥락 잘라내기를 통해 감독은 영화를 블랙 코미디의 한 무대로 완전히 꾸밀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는 김재규의 의도를 미궁 속으로 던저놓고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2 혁명은 위에서 돌고 돌 뿐]


 다만, 영화는 몇가지 장치를 통해 김재규의 의도가 어떠했든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은 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돌고도는 권력 순환 놀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장치는 '일본어'이다. 영화에서 박정희와 김재규는 계속해서 자신의 심중을 표현하는 말에 일본어를 사용한다. 당시 일본어의 사용은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한국 장년층에게 흔치 않게 보일 수 있는 현상이긴 했다. 그러나 영화는 일본어의 사용자를 박정희와 김재규로 의도적으로 한정짓고 있다. 영화에서 일본어는 교육받은 상류층의 언어, 권력을 가진 자의 언어를 상징한다. 권력을 독점한 박정희가 똑같이 일본어를 사용하는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점은 이것이 혁명적 대의이든 우발적인 사건이든 결국 권력을 가진자들끼리 서로 벌이는 암투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에서 영화의 배경이 된 유신시대를 보는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3 무엇이 블랙 코미디를 만드는가]


 영화는 번뜩이는 재치를 통해 마련한 장치로 박정희 암살을 성공적으로 영화적 무대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언급한 일본어 사용 등의 장치를 통해 영화에 전반적인 블랙코미디 정서를 이식했다. 이 사건을 자기들끼리 싸우다 나자빠진 사건으로 희화화 가능한 대상으로 끌어내린다면, 영화 내부의 인물들은 역사적 기록에서 벗어나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율성 안에서 김재규 역할을 맡은 백윤식은 다소 들뜬것처럼 과장된 연기를 하거나, 다소 뜬금없이 소리를 질러댄다. 박정희 암살 이후 경호실 인력과 육군, 정부 고위층을 제압하라는 중대한 명령을 받은 중정 인원은 어리숙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사건을 급속도로 변화시킨다. 

 

중정 인원은 라면을 먹다가 박정희의 시신을 총리 일행에게 내어주고 만다.

 

 하지만 감독은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입니다'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한 인물의 대사처리, 행동은 사건의 내적 정합성을 급격하게 떨어트리기도 한다. 김재규는 백윤식의 선을 넘나드는 가벼운 연기로 인해 점점 단순한 미치광이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긴장감을 빼기 위해 설정한 여러가지 장치는 영화를 블랙 코미디보다는 그냥 코미디로 만들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곳은 쉬어가야할 타임이니까 웃으세요라고 강제하는 느낌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냉소적인 감정을 가지고, 좀 더 차분한 연기 톤을 유지했다면 오히려 의도한 블랙코미디의 연출을 극대화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재규는 자신의 뺨을 번갈아가면서 때리는데, 이는 '정신차리자'의 의미보다 '웃어주세요'라는 의도가 훨씬 강해보인다. 

 

 개인적으로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암살의 서술방식, 의도성을 가진 영화적 장치 등에서 '남산의 부장들'보다 잘 구상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보다 잘 구성된 영화는 아니다. 내적 정합성은 연기가 진행될 수록 흔들리고 있고,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던지는 개그와 대사는 허무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에게 김재규와 그 사건에 대해 충분한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함의는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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