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리뷰

밀양의 구원과 신정론(神正論) - 영화 밀양-

Lee Word 2021. 1. 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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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은 무엇인가]


불편한 영화였다. 포스터에 새겨진 ‘사랑’이란 단어는 이미 영화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 뒤였다.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다.’는 말은 감독의 변명에 불과했다. 시시껄렁한 멜로물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는 의미 없는 잔혹성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숨 막히듯 조여 오는 고통들이 여인을 몇 번이나 실신시키는 장면을 시키는 대로 보아야 했고, 고통의 끝에서 피어나는 역설적인 환희가 그녀의 울음을 통해 토해내 짐을 느껴야 했으며 종국에는 믿음의 날개를 잃고 어둠속으로 추락하는 한 여인을 보아야 했다. 불편했던 점은 이러한 서사구조가 지속적인 하강의 곡선을 그렸다는 데에 있다. 그녀가 끝없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의미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했다. 울음을 감싸 안은 가식적인 웃음, 그리고 이와 교차되는 무의미한 표정들은 뒤에 이어질 잔인한 결과를 조립해나갈 뿐이었다.

 

그렇다면 포스터에 붙어있던 ‘사랑’은 무엇인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녀를 맴도는 남자, 종찬(송강호 분)이다. 영화의 초반, 우연한 계기로 만나는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줄곧 함께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한없이 그녀를 맴도는 그는 실상 그녀의 상처를 감싸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녀의 상처엔 별로 관심이 없다 해도 맞을 것이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남자가 보여주는 것은 제 3자의 상투적인 말과 표정일 뿐이다. 이러한 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여자가 아이를 유괴당하고 남자에게 달려가는 장면이다. 유괴의 사실을 안 후 여자는 가장먼저 그에게 달려가지만, 유리창 속의 그는 노래방 기계로 노래나 부를 뿐이다. 그는 그녀를 좋아한 것 일뿐 그녀의 상처까지 끌어안지 못했다.

 

 

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은 밀양으로 투영되는 아득한 님, 바로 하나님이다. 그는 종찬 과는 달리 심연의 고통에서 그녀를 구해낸 것처럼 보인다. 그를 받아들이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낸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의지와 행복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종찬 과는 달리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 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평온한 모습에서 그녀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모든 것이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아님을 역설한다. 신이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이율배반적이다. 사랑은 ‘편향’이라는 단어를 항상 수반한다. 치우치지 않은 사랑은 ‘공정’일 뿐이다.

 

이 영화 어떤 곳에 사랑이 깃들었단 말인가. 영화 내내 그녀는 현상적으로도, 존재론 적으로도 혼자였다. 단지 감독은 처참하게 찢겨져가는 여인의 일생을 관찰하였다. 소름 돋도록 아픈 몽타주의 이어붙이기에 불과한 것이다. 감독은 사랑이 아니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였단 말인가.

 

[#2 이율배반적 현실과 구원]


영화는 청명하고 고요한 밀양의 하늘로부터 시작한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난 후 신애와 신애의 하나뿐인 아들인 준은 저 멀리 밀양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은 남편의 고향이자 남편이 평소 살기를 소망하였던 곳, 그녀가 새로운 정ㅌ착지로 밀양을 택한 이유는 이것이 전부이다. 사랑하였던 남편이 가장 사랑하였던 곳을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밀양으로 향하는 길에 차 고장을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 카센터 주인 종찬 에게 “밀양은 어느 곳인가요?”라고 질문 해 놓고는 바로 자문자답하듯 말하는 ‘비밀의 햇볕’이란 밀양의 한자 풀이는 그녀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밀양의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햇볕이 자신의 상처를 감싸주리라 믿었다.

 

영화 초반, 이러한 환상은 활기를 잃고 사그러든다. 생소한 곳으로의 이주는 그녀에게 정착과 동화의 아픔을 심어주었다.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듯 사라진 그녀에게 버팀목이 될 만한 가족은 아들 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밀양의 사람들은 그녀를 쉬이 받아주지는 않았다. 없는 돈에 땅에 투자하겠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그녀의 이러한 자조 섞인 허영심은 이러한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허구를 강조하고 자신을 올림으로써 낯선 땅 밀양에 정착하려 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는 어느 정도 밀양의 햇빛에 적응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제껏 비밀스럽게 내리쬐던 햇빛은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고 따갑게 주인공을 할퀴기 시작한다. 마침내 준이 납치되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삶에 유일한 낙이자 이유였던 준의 유괴는 그녀를 한없이 큰 혼란 속으로 빠트린다. 끝내 아들이 사망하고 그 범인이 아들의 유치원 원장으로 드러났을 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자신이 말하고 다녔던 재산에 관한 의미 없는 과대포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충격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납득할 수 없는 슬픔은 미어지는 내면의 눈물이 되어 몇 번이고 신애의 목을 조이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창백한 표정만을 내비칠 뿐이다.

 

이제 드는 질문은 도대체 왜라는 것에 대한 물음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녀가 ‘마땅히’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부리던 호기로운 거짓말들이 과연 아이의 죽음으로 처벌받을 만한 중대한 윤리적 잘못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 것이다. 그녀는 분명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적인 틀 안에서 사고되는 영화관을 나오면 우리는 보다 더한 물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하철역에서 헤진 옷을 입고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들은 어떤 잘못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평생 의롭게 살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또한 이러한 의문을 환기시킨다.

 

윤리 책에 나와 있는 대로의 삶은 현실에서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반대로 흔히 악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에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율배반적이다. 행복에 다가가는 두 가지의 대립적 시점은 적어도 현실에 와서 만큼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제도하는 우주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모순점들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힌트라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3 신의 사랑과 정의, 신정론]


신애는 절박하게 신의 의지를 찾고, 증명하려 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secret sunshine(비밀스러운 햇볕)은 그녀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에 대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점차 기독교적 신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그녀는 햇살 조각 하나하나에도 그의 의지가 투영되어있음을 인정하였다. 끝없이 갈라지는 고통의 파편들은 그녀를 세차게 밀어 신에게로 도달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원받게 하셨다. 그녀는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그녀는 마침내 결심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고, 찾아가 그 뜻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단연 살인자가 자신은 구원받았음을 말하는 장면이다. 영화 후반의 섬뜩하리만큼 안타까운 자해나 그녀의 대사들보다도 이 장면이 더 비중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신의 사랑과 공의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용서 받기 전에 용서 받았다

살인자가 회계하고 궁구하는 대상은 준이나, 신애가 아닌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구원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모순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단연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이다. 그녀는 하느님이 그를 용서했음을 알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그를 용서하려고 왔지만 그는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이러한 결심을 하기 오래전부터 그는 회계하고 용서 받았다.

 

이 기묘하고 아이러니한 장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앞의 물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아니, 행복이 신에 의한 구원으로 한정되어 버린 이때야 말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세상을 창조해낸 신에게 과감히 항의할 수 있다. “당신은 정의로운가요?

 

애초에 신은 정의롭다고 규정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초월적 존재로써 그는 모든 인류를 구원해야할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인류를 무한히 사랑하면서 동시에 공의의 관점으로 세상을 구도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신은 세속의 인과율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죄를 사하여주는 신과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신의 불편한 동거로 인해 신은 자신의 완전성을 지속적으로 훼손당하고 있다. 또한 신은 이 논리의 틈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모든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인류의 변론 서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로 오히려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갈수록 격렬해지는 신애의 신에 대한 도전들은 이러한 카오스 속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되지 않으며, 그것들은 모두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신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판단 자체를 거부해 버리고 모든 것을 일방적인 믿음으로 감내하면서 고통과 함께 존재하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 혹은 이러한 모든 비이성적인 시련을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위한 허들임을 인지하고 그 뜻을 짐작하며 견뎌나가는 것. 이런 것들을 수용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원망하며 더욱 고통스러운 삶에 서있어야 한다. 신은 정의롭다는 믿음은 달콤한 유혹에 불과하다. 인류가 갈망하는 신의 고귀한 완전성은 사랑과 정의라는 기본적인 의미 사이에서 깨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4 구원의 주체]


결국 이 영화는 사랑도 정의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끝 장면에 해당하는 신애가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그녀가 남에게 의지하는 의지적이고 유아적인 관념에서 탈피를 하고 있음을 암시 할 뿐이다. 이율배반적인 현실에 대한 구원은 자신의 손 안에 주어져 있음을 그녀는 오랜 고통 끝에 손에 느낄 수 있었다.

 

신애는 머리를 자른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나의 경험적 인식으로부터 기인한다. 나는 한때 신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리고 아직도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이와 비슷하게도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나는 신이 정의롭다는 기독교의 사상은 인간의 입장에서 신을 제단 해버리는 하극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신에 대해 판단을 거부하고 오로지 믿음만 강요하는 신비주의적 신정론 또한 타당한 해석이 아니다. 나에게 신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내가 아직도 종종 하는 기도에도 신에 대한 요구나 기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완벽한 타자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창조주로써의 존재의 의미만을 지닌다. 어떠한 다른 의미도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결국 영화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모든 구원은 오로지 나에게만 존재한다. 그것이 영화처럼 신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하던지, 신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시점에서 시작하던지 남은 결론은 오직 자신의 정신이며 그것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단순한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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