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리뷰

벤야민 이론을 통한 올드보이 감상

Lee Word 2021. 8. 1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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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신산만한 시험관]


발터 벤야민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미치는 최고의 지성이자, 대중문화를 예술의 영억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무한히 복제 가능한 대중문화가 예술의 진품성과 일회적 현존성으로 구조화 된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온전한 침잠을 방해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기존의 제의적 가치로부터의 탈출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문화의 의의를 찾고 있다. 우리는 예술이 강요했던 일방적인 의미의 가치 전달로부터 탈출하여 예술을 비판하는 시험관, 그의 말에 의하면 침잠을 거부한 ‘정신 산만한 시험관’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으로부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을 경험하기도 한다. 오감을 압도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나 스릴러,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감상자의 상황과 영화의 구조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각적 이미지가 현실의 이미지로 재구축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벤야민 이론이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벤야민 이론의 수정과 그에 따른 개별 영화에 대한 적용의 필요성을 느낀다.


[#2 벤야민 이론의 수정]


종전의 벤야민의 대중문화에 대한 논리구조에서 일부는 수정되어야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수많은 카피와 복제 가능성은 분명 아우라의 붕괴를 가져왔다. 대중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영화 필름이 진품에 대해 판단 자체를 거부하며, 설사 그것이 세계에 뿌려진 만이천오백장의 카피본 중 감독이 처음 만든 원본일지라도 그 사실 속에서 틀별한 경건함이나 압도를 느끼지 않는다. 압도적인 경외심이 사라져버린 예술 속에서, 우리는 순수예술에서 보여지는 일원적인 의미함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능동적인 비판과 자유로운 감상의 태도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벤야민이 당시에 생각했던 논의의 구성과는 달리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붕괴된 아우라 속에서도 우리는 대중예술로의 침잠이 가능해졌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중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영상에 노출된다. 영상의 범람은 대중들로 하여금 침잠을 방해하는 파편적이고 순간적인 이미지들의 ‘충격’으로부터 시각과 뇌가 점차 익숙해지게끔 만들어버린다. 대중은 더이상 영상 매체를 프레임 단위로 분절시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영상 자체로의 의미를 수용하고 해석한다. 영상에 익숙해진 대중의 태도는 대상으로의 감각적, 감상적 침잠을 부활시킨다.
카메라 기술과 편집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양상을 가속화시켰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시스템에서 고도화된 보이지 않는(Invisible) 편집 기술은 우리의 시각으로부터 편집 시점과 영상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지워버리는데 성공했다. 카메라의 성능향상이나 그래픽 기술의 발달은 영화가 제작되었던 초기와는 달리 영상을 현실의 풍경으로 끌어 당긴다. 우리가 인지하는 시각적 화소와 카메라의 그것은 일체와 되어가며 영화배우와 관객사이의 소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부력화 시킨다.

침잠하는 대중은 비판적인 감상태도를 버리고 대중예술을 신성한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는가. 우리는 벤야민의 이론을 뒤집어야 한다. 현대의 대중은 침잠 속에서도 충분한 비판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아우라의 붕괴로 인해 복제 가능한 영화에 대한 경외심은 사라졌다. 사라진 경외심으로 인해 대중은 대중예술에 침잠하면서도 대상을 신격화시킬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긴장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반대로 대상과 대상이 속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영화로 대표되는 대중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이 사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극장과 같은 일방적인 소통매체로 의견의 표출이 한정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 사회는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쌍방향 의사소통이 당연한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난 후 가치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이러한 쌍방향 매체에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도, 반박하는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때는 완전히 침참하면서도, 사후적으로 일어나는 간치판단에서는 충분한 의사소통을 통해 종교적 몰입에서 벗어나 다시한 번 산만한 시험관의 태도로 돌아올 수 있다.


[#3 영화 올드보이 비판과 벤야민 이론의 도입]


수정된 벤야민 이론을 토대로 영화 올드보이를 잠깐 해석해보자. 2003년 제작되어 수많은 국내, 국제 상을 휩쓴 올드보이는 그 수상내역 만큼이나 압도적인 몰입감을 자랑한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15년간 누군가에게 감금된 남자, 자신을 가둔 누군가를 찾기위한 5일간의 숨막히는 추격 끝에 발견하는 ‘누구’와 ‘왜’에 대한 해답은 모든 복선을 한꺼번에 끼워 맞추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최민수와 유지태의 광기어린 연기는 우리를 시종일관 영화에 침참 시킨다.

올드보이의 미학적 완성도를 차치하고 분석해보면, 우리는 영화가 근친상간의 미화된 이미지를 은밀히 창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유지태가 분한 이우진이 행하는 복수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진이 벌인 처절한 복수극은 자신이 사랑하던 사촌지간 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수아의 죽음의 원인을 오대수의 경거망동으로 한정하고, 죄의식 전체를 오대수에게 투영한다. 하지만 실상 수아가 괴로하기 시작한 것은 근친상간의 터부를 깬 죄책감의 자각이라는 점과 결국 다리위에서 자살하려는 수아의 손을 놓아버린 것은 우진이었다는 점에서 수아의 죽음을 관통하는 원죄는 우진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진은 복수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죄를 투영하고 귀책시킬 화풀이 대상을 찾고 15년간 가두었던 것이다.



오대수에게 완전히 투영된 죄의식 속에서 이우진은 자신의 원죄 중 하나인 근친상간의 본질을 미화하기까지 이른다. 오대수의 딸인 미도와의 관계를 밝히는 과정에서 이우진의 미화는 절정에 다다른다. 서로에게 최면을 걸어 오대수에게 딸인 미도와 성관계를 맺게끔 한 뒤, 마지막 순간에 둘의 부녀지간을 밝혀내는 장면이 그렇다. 이우진이 자신있게 묻던 “우리는 알고도 사랑했어,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근친상간의 윤리적 터부를 완전히 발라낸 채, 자신의 관계를 윤리적 금기를 넘어선 초월적인 사랑으로 미화시키고자 하는 복수자의 권능에 다름아니다. 반대로 복수의 대상자인 오대수와 미도 간의 성관계는 둘의 관계가 드러난 시점부터 타락하고 저주받은 것이 되어버린다. 오대수가 자신의 혀를 잘라내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어이 최면으로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등의 반응은 “알고도 행한 근친상간’의 이미지를 더욱 고결한 행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위대함과 뛰어남은 분명 별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예술을 형용하는 위대함이란 그 자체로 판단과 비평으로부터의 제도적인 거부를 의미한다. 반면 영화는 종종 특정한 관점에 자신의 논의를 주입함으로서 자신의 가치판단을 거칠게 쏘아붙이지만, ’뛰어남’의 영역에서 대중문화를 판단하는 대중은 칭찬과 비판 모두가 가능하다. 신성이 제거된 대상은 비로소 날개를 잃고 땅으로 내려와 평등한 관계에서 대중과 의사소통한다.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비너스를 보며 할 말을 잃어야 하지만, 영화 비너스를 보면서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4 현대사회에서의 대중의 역량]


벤야민 주장의 핵심은 아우라의 붕괴가 아닌, 대중의 긍정적인 역량이다. 아우라의 붕괴 속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대중예술의 긍정적인 가치를 발굴해내는 것은 전적으로 대중에게 달려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분하는 척도는 대중예술 각각의 질적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판단해내는 대중의 특성으로 유도되어진다. 개별의 나쁜 대중예술도, 대중이 그것을 손쉽에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민주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대중에 대한 역할 기대는 조금 더 커졌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대중문화 섭취에 익숙해져버린 대중은 대중예술속에 침잠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침잠 속에서 침잠의 대상을 비판해야하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물론, 다시, 앞선 논의에서 우리는 침잠 속에서도 대중예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견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벤야민의 주장은 대중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저에서 충분한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중이 표준적인 정규분포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의 층위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리면서도,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평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벤야민의 낙관론 뿐만 아니라 아도르노의 무지몽매한 대중이론 역시 적절히 비판적 관점에서 수용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쌍방향 의사소통 매체의 발달은 대중의 긍정적인 역할을 확대하는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군집된 의견을 선호하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자유로운 매체를 통해서는 단 한명의 이의제기만으로도 큰 반향을 낳을 수 있다. 대중은 자신의 전문적인 분야에서 의견을 표출하며, 이것은 서로를 이끌어 더 높은 수준의 평균적인 대중을 구성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점점 상향되어가는 대중은 예술 전반을 비판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놀 것이다. 매체의 민주화는 곧바로 예술의 민주화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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