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택과 집중, 오락영화로서 알맞은 편집]
영화는 주식이라는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관객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단순하고 매우 평이한 플롯을 지향하고 있다. 어리버리한 증권 브로커 일현은, 부자가 되고 싶은 부푼 꿈을 안고 증권가에 들어왔지만 6개월 넘게 사고만 치는 사회초년생이다. 일현은 같은 사무실 유민준 과장의 소개로 일명 “번호표“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부정적으로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다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그를 배신하고 그가 잡히도록 금융감독원을 돕는다.
감독은 ‘돈’이라는 직설적이며 직관적인 영화 제목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직선으로 달려가는 인간 군상에 대한 영화를 완성하고자 했다. 평이하고 어디서 본 듯한 스토리라인은 관객이 좀 더 빨리 영화의 상황을 파악하고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영화는 금감원의 한지철을 시종일관 “정의”의 조명으로, 번호표를 “부정의”의 조명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일현에 핀조명으로 쏘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한다. 이제 우리는 일현의 표정과 행동을 따라가면서 그의 선택에만 집중하면 된다. 아는 플롯 속에서 고정된 인물구도 속에서 주인공이 보고 보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감정에만 집중하면 영화를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평이한 영화를 비판할 수 도 있지만, 이 영화가 오락영화를 지향한하는 점에서 큰 불만 거리는 될 수 없다. 관객은 쉽게 몰입하고 쉽게 주인공과 자신을 동화 시킬 수 있다. 2시간의 오락거리인 셈이다.
주식 보다는 “돈“ 자체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 다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영화는 주식을 하나의 무대장치,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식 사기는 욕망을 채우는 가장 손쉽고 빠른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영화는 기술적 분석이나, 사기 수법의 정합성을 굳이 설득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관객은 그저 일현이 땀을 흘리며 눈을 부릅뜨고 매수 혹은 매도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는 장면을 통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구나 정도를 느끼면 된다. 이 지점에서 잠재 관객 대상은 주식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이는 영화의 수익성이라는 측면에서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의 오락영화를 보러 온 관객이 주식의 이것 저것을 알 필요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스토리 상의 선택과 집중은 영화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관객 수입이라는 돈이라는 욕망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에 출연하고, 제작하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함의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 힘을 뺀 만큼 잃어버린 무게]
다만, 영화는 주식이라는 수단의 평이함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에 등장하는 주식 사기수법을 너무나 낮은 수준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주가 조작의 흑막인 번호표가 지휘 했던 작전 중 하나를 살펴보자. 번호표는 면밀한 계획을 통해 주식 시장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증권사 직원을 매수하여 일부러 특정 주식을 낮은 가격에 매도하고 다른 브로커들이 헐값에 던진 주식을 잡도록 하고있다. 이는 지능범죄로 분류하기도 애매한 수준의 작전일 뿐더러, 실제 주식을 헐값에 매도하게 되는 인물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이다. 매도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잡혀 처벌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실상 모든 계획이 탄로가 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허술하다.
더 나아가 번호표는 특정 회사 주식에 공매도를 걸어놓은 다음, 공장 창고에 불을 질러 주가의 하락을 유도한다. 또한 수 틀리면 회사 사장을 죽여서까지 주가를 하락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번호표의 죄목은 주가 조작이라기보다는 살인교사 및 방화 등의 죄목에 좀 더 어울려 보인다. 영화는 결국 주식시장 단순 배경으로 활용한 일반 범죄영화로 변형된다. 이러한 특성은 영화 “신의한수“를 볼때 느꼈던 감정과 일치한다. 주식과 바둑은 테마와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결국 주요 인물의 사건 해결은 살인과 방화 등 물리적이고 원초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나타난다. 영화의 배경과 메인 플롯을 지나치게 단순화 해버린 나머지, 영화 내부에서 주식과 바둑을 빼고서도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을만큼 영화의 배경은 가벼워진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된 상황에서 영화의 배경이 여의도여야 하는 이유 역시 사라진다. 증권사 내의 치열한 분위기와 여의도의 마천루는 음식 마지막에 뿌리는 향신료처럼 풍미만을 가미할 뿐이다.
[#3 아쉬운 정합성, 설득력을 잃은 인물 ]
오락영화에 있어 플롯과 등장인물의 평이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러나 내적 정합성을 따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같은 플롯 속에서도, 관객이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배경과 인물이 논리적으로 그럴듯 해야한다. 구조적으로 복잡할 필요는 없다. 인물의 배경과 선택이 현실의 논리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그들이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영화적 현실로 의식을 이관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오락영화라도 결여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플롯 구성의 평이함이 아닌 정합성으로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은 주요 등장인물과 스토리의 내적정합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감사로 등장하는 한지철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일관된 ‘정의’의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선”의 의미와는 약간 다른데, 한지철은 현행법상 불법인 도촬이나 함정수사, 양형 거래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수사를 지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초반에는 단순 금감원 직원으로, 수사권도 없었다. 한지철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 끈질긴 집착을 보여준다. 이는 그냥 사람이 좋아서 선하다라는 의미와는 또 다른 측면으로, 영화는 반드시 한지철의 집념에 대해 설명하고 관객을 설득해야 했다. 단순히 그가 맡은 바 임무를 다 하는 워커홀릭이라는 설정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그냥 니가 싫어, 너희들이 하는 일이 도둑질이나 사기와 뭐가 다른데”라는 대사 역시 내가 인물을 해석하기에는 충분히 않다고 느꼈다.
번호표 역시 내적정합성이 훼손된 상태로 유지태 특유의 멋짐과 카리스마로만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번호표의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동과 말로 파악한 번호표 본질은 한지태보다 훨씬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로 파악된다. 번호표가 몇백억대 이상의 주가조작과 그와 연관된 범죄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강력한 동기는, 영화 내의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재미”이다. 자신이 계획한 범죄가 일차의 오차도 없이 메이드되는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계속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계획된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쾌감이 그의 악행의 원동력이라면, 최초 번호표를 소개해준 유민준 과장을 카르텔에서 점차 제외시켜 나가는 동기 역시 그 지점에서 반드시 설명을 했어야 한다. 어리버리하고 변수가 많은 신입을 카르텔 안으로 들이면서, 동시에 배테랑 인물을 내치는 동기는 어디에도 설명되어있지 않다. 일현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의 마지막에 그와 CCTV와 목격자가 있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만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자신을 불확정성의 바다에 내 던지는 행위였다. 물론 그가 설치하거나 준비한 비책은 없다. 이제는 번호표 머리속에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조연 역시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된 상태에서, 논리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지 않다. 증권사 박시은 대리는 한결같이 섹시한 자태로 이남자 저남자 꼬시다 일현에 정착했다 곧바로 그를 배신한다. 다니엘 헤니를 바하마에 우연하게 등장시키고, 그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거래가 될 우성무역의 거래의 브로커로 활약한다는 서술은 영화 서술의 편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만, 너무나 작위적인 연출이었다.
[#4 모두가 돈에 관심없는 돈에 관한 영화]
영화에서 주식은 배경으로서의 가치만 지니고, 영화의 본질에서 탈락한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 전반을 이끌어나가는 번호표는 모든 일의 동기로 돈을 지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오락과 범죄가 완성될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이야기한다. 범죄 성공 -> 돈 획득 -> 카타르시스의 구조가 아니라, 범죄 성공 -> 카타르시스의 자극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일현에게도 나타난다. 영화는 내러티브에서 주식과 돈을 점차 누락시킨다. 모두가 돈돈하고 있는데 돈은 저 멀리 날아가는 영화, 아이러니한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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