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을 전후한 유럽과 미국의 통상요구는 도쿠가와 막부의 전복과 이어지는 일본의 본격적인 세계사로의 합류의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1806년 ~ 1807년에는 러시아의 해군장교들이 홋카이도, 사할린, 에토로후 섬에 있던 일본인 거주지를 공격해 파괴했으며, 1818년 영국의 함대는 에도의 우라가 만에 진입해 통상요구를 하는 등 서양 열강의 접근은 점점 더 빈번해 지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1825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전 보다 더 강화된 쇄국령을 공포한다. 이는 외국선박을 발견 즉시 격퇴하라는 명령으로, 극단적인 통상 거절 조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이미 서구 열강의 주도로 편제되는 세계화의 추세에 근본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무기는 되지 못 하였다.
1842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은 서구열강에게 무력을 통한 통상요구의 관철과 그에 따른 불평등 조약에 대한 모범적 사례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이는 이웃나라인 일본에 대한 통상요구에 있어서의 일련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내에서도 아편전쟁은 서구의 무력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과, 무력을 동반한 통상요구에 있어서 쇄국령이 실질적으로 어떤 기능도 작용하지 못한다는 회의론을 대두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후 1842년 막부는 일단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완화 하면서, 그들의 무력의 실재인 기술과 무기 수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1853년은 이러한 일련의 통상요구 중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미국의 페리제독은 일본에 도착해 평화롭게 통상, 아니면 전쟁이라는 원칙을 제시하는데 이는 서구의 무력에 대응할 수 없는 막부에겐 일방적인 개항통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년후 1854년에 미국과 맺은 가나가와 조약의 조건들은 이후 서양열강들과의 조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1858년에 이르러는 중국과의 난징조약과 거의 유사한 통상조약에 조인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서양 문물의 무제한적 수입을 예고하는 동시에 개항을 효과적으로 조율하지 못한 막부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붕괴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정권은 1857~1858년 쇼군 후계자 선정문제와 대미 통상조약 교섭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로주 수석인 훗타 마사요시가 주도한 대미 통상조약의 조인과 쇼군선정 문제에서 천황이 통상조약의 불허와 쇼군선정에서의 로주 수석의 의견을 거부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여러 복잡한 정치세력이 각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열강들과의 통상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한 막부는 정통성을 위시한 정치집단으로의 기능을 상실해 나가게 되었으며, 이는 반대로 천황을 중심으로 막부에서 소외 되었던 도자마들과 사무라이들이 규합해 존왕양이의 기치아래 막부와 서양열강을 제압하려는 양이 운동의 근거가 되었다.

사실 존왕양이라는 명제에 분류되진 않지만 막부의 개방정책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쇄국정책 옹호자 들은 1800년대부터 늘 존재 해오던 것이었다. 이 쇄국 옹호자들이 서양열강에 대항한 내셔널리즘의 기치로 존왕양이의 정신을 내세우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8년대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봉기를 시작으로 1850년대 막부에 대항하는 반체제 집단이 지방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후 막부는 타협안과 강경책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홋타에 이어 최고 관리가 된 이이 나오스케는 1858년 천황의 윤허 없이 통상조약에 서명하였고 어린 쇼군을 자의적으로 선정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도쿠가와 독재로의 회귀에 대한 염원이었다. 1858년 같은 해 안세이의 대옥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해 다수의 개혁적 다이묘들을 실각시키고 사무라이 지사들을 투옥 혹은 처형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반(反)막부세력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이는 1860년 미토번의 지사들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이후 구성된 도쿠가와 지도부가 회유책으로 전환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공무합체제도를 통해 막부와 천왕의 합의체에 의한 정책구성의 방안을 세운다. 이는 천황과 쇼군과의 정치적 연결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사실상 교토에 기반을 둔 영주의 자문단이 국가 의사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효과도 함의한 것이었다. 1862년 막부가 폐지한 참근교대제 역시 불필요한 경비 축소를 위해 불가피 했던 것으로 보이나, 다이묘에 대한 정치적 통제의 사실상 철회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이파 지사들은 일련의 정책들에 만족하지 않았다. 1863년 고메이 천황을 설득하여 쇼군에게 즉각 서양세력을 추방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게 했다. 쇼군은 협상을 위해 교토로 갔지만 1863년 6월 25일에 서양 야만인들의 추방을 약속한 뒤에야 에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약속은 이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당 날짜에 실제 서양 추방을 단행한 것은 조슈 번 이었으며, 서양 군함에 보복이 감행되자 막부는 조슈 출신 지사들을 교토에서 축출한다. 이후 진행된 막부의 조슈 번 점령은 막부의 개혁에 정력적인 활기를 불어 넣는데 성공 한 듯 보인다. 1865년 오구리 다다마사는 서양식의 군제 개편을 감행한다. 또한 1866년 개혁파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새로운 쇼군이 되면서 개방, 개혁 정책은 급속히 진행 되었다.

한편 조슈의 존왕파는 1864년의 패배로 힘을 잃었으나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는데 주력한다. 다카스기 산사쿠는 농민의 군대 합류를 허용, 서양식 무기의 도입으로 군대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여 1865년 조슈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다. 사쓰마 번 역시 군사력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여름, 막부군은 조슈번을 응징하기 위해 두 번째 응징에 나서지만 막부의 충격적인 패배로 끝나고 만다. 이후 막부의 일본 영토에 대한 지배력은 실질적으로 상실 된다. 1866년 적어도 35회의 폭동과 106회의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막부의 지배력 상실에서 오는 무정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67년 막부는 도쿠가와의 독점적 지휘를 강등하여 다이묘 협의체와 사무라이 및 서민들을 대표하는 제2의 협의체에 의해 지배되는 양원제로의 변경을 승인한다. 이에 막부의 완전한 폐지를 축구하는 사쓰마와 조슈의 반란세력,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조정내의 세력은 1867년 12월 황거를 장악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할 것을 촉구한다. 막부는 폐지된다. 1868년 4월 남아있던 막부군의 사령관 가쓰 가이슈가 싸움을 포기하고 에도를 반란군에게 넘겨주게 된다. 또한 반란군에 저항하여 전쟁을 불사하던 번 역시 항복하며 정치적 영향력은 천황에게 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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