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 강변에서의 celt족과의 전쟁에서 387년 패하면서 이틀 뒤 로마가 celt족에 의해 함락되고 약탈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고 로마의 대내정책에 있어서의 일련의 개혁이 강행되는데, 이는 전쟁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본래 로마사회가 내제하고있던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당시 전쟁을 지휘했던 consul과 consul직을 관장했던 patrici에 대한 반성과 당시 시민군으로써 전투에 참여했던 plebis 양쪽에 책임을 묻고 그것을 개혁하는데, 먼저 patrici가 독점했던 consul직 중 한명을 plebis에게 개방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445년 통혼법으로 상위 일반민 계층과 귀족들의 통혼이 성행하는 가운데, 양계상속제로 유지되던 귀족들의 수가 급감하면서, 능력에 상관없이 consul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곧 전투에서의 패배로 직결된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한 조치로써 시행된 것이다.
또한 시민군의 전력 약화의 원인으로 부채로 인한 자유의 상실이 시민군의 절대수를 감소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445년 통혼법으로 로마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였던 시민과 귀족의 통혼문제는 해결됬으나, 귀족들의 고리대금업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진 못했든데, 이로인해 노예계급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시민군으로써의 기능을 하지못하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시민군의 절대수와 그들의 군비로 이용될 재산을 보전해주기 위해 각 개인에게 500유게라씩의 토지 상한선을 만듬으로서 자연적으로 시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도록 하였다. 당시 500 유게라는 60명 정도르 부양 할 토지였다. 또한 현재 상환중인 부채에 대하여 이제까지 지불된 이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만 지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부채탕감의 효과를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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