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10일간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일본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의 타임라인을 통해 재구성해보았다.
* 8월 7일 오전
- 외무부 장관의 핫라인을 통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앎. 이에 따라 사실 확인을 위해 군부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군 측은 원자폭탄이 아니라고 주장. 그는 곧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의 위협에 대해 상기하기 시작.
* 8월 7일 오후
- 긴급 내각회의 소집. 미국의 포츠담선언에서의 위협을 근거로 군부정권이 항복을 수락할 것을 설득하기 시작. 그는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군사적 무기가 군부의 패배를 설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을 확신 (새로운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패배한 것, 군사전술이나, 정신력에서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 또한 포츠담 선언이 천황제 존속을 약속했다는 것을 빌미로 설득
- 군부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도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음 .
* 8월 8일 오전
- 총리 스즈키의 동의를 얻어 천황의 황궁에 위치한 대공 방어 벙커에 직접 찾아가 천황을 설득하기 시작. 포츠담 선언에 따라 천황의 자리는 보전될 것을 설명.
- 그는 설득의 근거로서 서구에서 방송되고 있는 원자폭탄 관련 보도를 인용.
“ 원자폭탄은 전쟁의 양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무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전체 나아가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대 격변이라고 설명. 이는 전쟁을 끝낼 획기적인 터닝포인트로 간주되어야 함.”
-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미국은 계속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이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역설
- 천황인 히로히토 항복이 가장 실현 가능할듯한 해답이라고 인정. 히로히토로부터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과, 이러한 그의 관점을 총리인 스즈키에게 전달하도록 통보 받음
* 8월 8일 밤
- 스즈키를 만나 최고 전쟁 회의가 소집되어야 한다고 제시
* 8월 9일 오전
- 도고는 스즈키를 방문에 소련의 참전을 알림. 스즈키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
- 06:30 ~ 09:00 육군 대신 요나이와의 회동. 요나이는 패배가 시간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구체적인 항복에 대해서는 이견
- 10:30분 최고 사령관 회의 열린 모든 참석인이 전쟁수행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
- 하지만 항복을 위해서는 전쟁 최고 회의와 내각의 만장일치 동의를 필요로함
- 도고는 다시 한 번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일 것을 강조. 또한 천황이 이미 항복하기로 뜻을 굳혔다고 다른 참석자들을 설득
- 오후 1시 나가사키에 다른 폭탄이 떨어짐
토론의 열기를 더해가고 해군 대신 요나이의 지지를 받아 항복을 계속 주장
* 8월 9일 오후
- 아나미는 포츠담 선언을 원론적으로는 받아들이되 3가지의 추가조건을 요구
- 오후 14:30분 첫 번째 내각 회의 파국
- 18:00 재차 회의 시도
- 도고는 3개의 추가적인 조건이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 반론
- 자정 즈음하여 스즈키가 황궁의 방공호에서 재 회의 개최
- 격렬해지는 토론.
- 이때 총리가 직접 천왕에게 다가가 천황의 의견을 구함.
* 8월 10일 오전
- 02: 30분에 천황은 도고의 의견에 동의하며,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논란을 종식시킴
- 발언이 내각에 의해 수정된 이후, 토고가 발의문을 스위스, 스웨덴 정부를 통해 미국으로 전달
* 8월 14일
- 천황의 권한이 연합사령부에 귀속되어야 할 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으로 다시 한 번 재소집.
- 도고는 미국의 조건에 승낙할 것을 주장
- 히로히토는 다시 도고의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논란을 종식
* 8월 15일
- 천황은 항복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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